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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분노가 사람을 꿈꾸게 한다

기사승인 2018.03.13  15: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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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S뉴스통신 도남선 기자.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영화 킹스맨에 나오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 일본 턴제 PPG 고전 조조전에서 조홍이 퇴각할 때 하는 말이다. 역시 좋은 말이다.

여기에 하나 더 붙여보면 어떨까. “분노가 사람을 꿈꾸게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돌아보면 나는 참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권력에 밟혀왔다. 

아버지를 탓하기는 싫지만 난 어렸을 적 꽤 엄격하고 심각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홈스쿨링’ 쯤이 될 것 같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에게 아버지는 천자문을 외우게 하셨다. 필기체 교본을 따라 쓰고, 매일 읽은 책으로 독후감을 써야만 했다. 잠들기 전엔 일기도 검사 맡았다. 글씨가 엉망이거나 내용이 엉망이란 이유로 꾸지람을 맞고 다시 쓰는 일도 많았다. 

초등학교 수업이 뭐 어려울 게 있겠느냐만, 아버지의 숙제를 다 해내려면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어야 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천자문을 외워야 됐다. 불만이 없었던 건, 학교 수업보다 아버지 숙제가 훨씬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는 조용한 아이로 통했다. 말수가 적고 늘 책을 보는 아이. 더 나아가 어떤 선생은 날 자폐아로 보기도 했다. 물론 자폐를 앓은 적은 없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야구, 축구, 피구를 하며 뛰어 놀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1학기초에 전과목 시험을 본 일이 있었다. 학교수업에 집중했을 리가 없는 나였지만 그 시험에서 남녀 50여명 중에 10등 안에 들었었다. 정확한 등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3학년 1년간 시험은 그게 단 한 번이었다. 그럼에도 학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성적표는 미-양-가 투성이로 낙제에 가까웠다. 그 선생의 평가란에는 “성격이 착할지는 모르나 행동이 매우 느리고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난 1년간 그 선생과 단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성격이 착한지, 행동이 느린지, 내성적인지, 수줍음을 타는지를 어떻게 알았을까? 실제 나는 성격이 착하지 않고, 행동은 느리지 않았다. 단지 말이 없었다는 게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탄다고 평가할 이유가 될까. 거기다 시험 등수와는 전혀 별개의 성적표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한 것일까. 

당시에는 ‘촌지’가 일상화 돼 있었다. 꼭 현금이 아니어도 선생의 자리에는 늘 선물이 놓여져 있었다. 

소풍을 갈 때, 야외 활동을 갈 때 선생의 도시락을 왜 학부모가 싸줘야 할까? 난 의문이었고, 우리 부모님은 그런 걸 한 적이 없었다. 선물도, 도시락도, 물론 촌지도. 

4학년에 진학했을 때 담임이 바뀌면서 나에 대한 평가는 바뀌었다. 아쉽게도 그 선생님의 성함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항상 책을 읽고 있던 나에게 글쓰기 대회와 웅변대회 등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감사하다. 

5학년에 진학해서 내 악몽은 다시 현실이 됐다. 3학년 담임이 내 5학년 담임을 맡았던 것. 그 선생은 나를 항상 짓뭉갰다. 가장 아팠던 건 내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서둘러 가려는 날 붙잡더니 “나머지 공부를 해야겠다”며 특수반에 다니는 학생을 불러다가 “야, 도남선한테 숫자 좀 가르쳐 줘라” ... 당시 특수반은 몸 어딘가가 불편해 학교에서 따로 관리가 필요한 아이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절대 특수반 학생들을 비하하는 말은 아니다. 특수반에서 관리를 받다가 다시 일반 학생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나에 대한 그 선생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그 특수반 학생으로부터 더하기 빼기를 강제로 배워야만 했다. 

“어머니 한번 인사하고 가”라는 무언의 메시지라면 너무한 비약일까. 난 그날의 치욕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선(善) 자체인 우리 부모님이 세상에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치욕을 겪고도 나이는 먹었다. 6학년에 올라서도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학생들에게 툭하면 손찌검 하던 체육선생이 내 담임이었다. 왜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툭하면 뺨을 맞았다.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대다수의 평범한 학생들이 많이 맞았다. 그 선생도 역시 내가 뭘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6학년 1년동안 시험같은 평가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 졸업성적은 역시 낙제에 가까웠다. 체육 정도만 ‘미’였고, 나머지는 ‘양’, ‘가’였다. 

학급의 반장, 부반장, 학생회장, 부회장, 어머니가 육성회 임원인 아이들은 항상 성적이 좋았다. 평가도 후했다. “착하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고, 활발하고, 학급 활동에 적극적이다” 등등 나와는 정 반대의 평가와 함께 우수한 성적표를 졸업식에 받아갔다. 

내 6년치 졸업 성적표를 받아 든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셨다. “내가 널 어떻게 가르쳤는데”... 그럴만 했다. 아버지는 항상 지극정성이셨다. 아침에 NHK 아나운서가 녹음 한 일본어 교재 테이프를 틀어주셨고, 아침 6시 KBS 뉴스광장을 함께 보면서 아침밥을 함께 하셨다. 출근 하기 전 다 읽은 조간신문을 정갈히 접어 내가 깨끗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고, 잠들기 전 숙제검사가 끝나면 클래식과 피아노팝스 테이프를 틀어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회초리를 드셨고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맞았다. 내 마음에도 멍이 들었고, 변성기가 왔을 무렵엔 실어증도 왔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퉁퉁 부은 목에 손수건을 칭칭감고 말 한마디 못하고 몇주간 누워만 있었다. 

날 멍들게 한 건 아버지의 매가 아니라 선생들의 장난질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했다. 운도 없게 부산에서 손꼽히는 문제 학교(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로 진학 한 나에게 부모님은 큰 기대를 걸지 않으셨다. 난 그게 오히려 편했다. 공부보다 친구들과 모여 야구를 하며 놀거나, 중고 RC카를 헐값에 사 마진을 덧붙여 파는 중고거래, 스타크래프트에 더 관심이 많았다. 진학운은 없었지만, 그 때문인지 성적은 줄곧 상위권이었다. 아버지가 6년을 투자한 교육법이 중학교에서 빛을 본 것인지, 아니면 학교 탓인지는 모르겠다. 

평온한 나날 속에 잠시 잠재 돼 있던 내 분노는 이 시기 폭발했다. 지금도 강의를 다닐 때 이 시기에 중2병에 걸렸었다고도 이야기 하지만, 내 삶을 결정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이 때 발생했다. 

당시 우리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중학교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보는 내신성적에 ‘봉사활동’ 시간을 넣어두고 있었다. 매년 20시간씩 3년간 60시간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봉사활동’의 개념이 당시에 생각하기에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게 맞는 것인데, 강제로 하는 봉사활동이라니. 게다가 당시에는 ‘막도장’을 찍는게 관행이었다. 실제로 봉사활동을 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봉사활동 도장을 찍어주거나, 가족 등 아는 공무원이 있으면 그냥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학생들이 우체국에서 소인 도장을 찍는 봉사활동을 하고 나왔는데, 아무렇게나 찍어서 우체국에서 두 번 일을 했다는 얘기도 우스개 소리로 심심치 않게 나오던 때였다.  

내가 생각하는 봉사활동과 개념자체가 달랐다. 규칙이었는지 조례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시에 조사해 본 바 학교에서 홈룸(HR) 시간 등을 활용해 매월 정기적으로 봉사활동 교육을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차례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냥 “봉사활동 1년 20시간, 총 60시간을 채워와라”라는 명령 같은 것들만 머릿속에 있었다. 

1학년 시절 내 봉사활동 시간은 11시간이었다. 방학내내 놀러다닌 친구들도 20시간 다 채워 오는데 난 왜 부지런히 봉사활동을 찾아다니고도 11시간이었을까. 

“정직하면, 손해를 보는 걸까”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꼭 방학뿐만이 아니었다. 틈틈이 시간을 내 봉사를 다녔고, 2학년 1년간 꼬박 11시간을 채웠다. 

난 내 이런 봉사활동 경험과 다른 학생들의 실태, 그리고 학교에서 봉사활동 교육이 없었음을 정리해 교무실로 찾아가 담임선생에게 전달했다. 

당연하게도 퇴짜를 맞았다. 중학교 2학년 14살짜리가 하는 말은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고민 끝에 좀 더 큰 기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 선택은 청와대였다. 당시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듯, 청와대 신문고에 글을 올렸다. 내가 정성껏 취합한 정보와 각 학교의 봉사활동과 교육 실태, 그리고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봉사활동 정책이 진행돼서는 안된다고도 썼다. 봉사활동이 가산점이 될 수는 있어도, 필수가 되면서 부작용이 생겼다는게 내 글의 요지였다. 

지금의 청와대 국민청원과는 조금 개념이 다른, 단순 민원으로 신청해 그런지 답신이 늦었다. 

3학년에 진학해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 보기 좋게 떨어졌다. 한 반에 두명이나 나가서 표가 분산된 탓도 있었지만 나 스스로가 준비가 덜 돼서 낙선했다고 분석했다. 그렇게 다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에 나는 내가 청와대에 보냈던 민원 내용을 잊고 있었다. 그저 ‘또 무시하겠지’란 생각이 컸다. 

그런데 그 답이 3학년 1학기, 4월쯤돼서 돌아왔다. 약 반년만이었다. 교무실은 난리가 났다. 난 담임에게 불려가 호되게 혼났다. “학교 엿 먹이려고 이딴거 올렸나”가 주된 내용이었다. “학생회장 떨어져서 앙갚음 하려고 이런거 쓴거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무시하기로 하고, 날 찾으러 왔다는 장학사를 면담하기로 했다. 청와대는 민원을 접수 받아 교육부로 넘겼고, 교육부는 부산시교육청으로, 다시 우리 중학교 관할인 동래교육지원청으로 민원을 보냈던 모양이었다. 

4월의 어느 월요일에 시작된 장학사 2명과의 면담은 그 주 금요일까지 이어졌다. 면담은 아침 9시에 시작돼 학교가 마칠 때까지 교장실에서 이뤄졌다. 1주일간 수업을 듣지 못했다. 급식이 되지 않는 학교여서 도시락을 먹었는데 교장실에서 혼자 먹어야 했다. 

면담이라는 것도 별거 없었다. 일방적인 협박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인거 알지? 퇴학 당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민원을 취소해라”라는 말만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단 한 번도 내가 왜 이런 민원을 제기했는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깡은 있었던 모양이다. 목요일까지 4일간 이어진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내 민원 내용을 그들에게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묻지도 듣지도 않으니 제대로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냥 날 교장실에 가둬두고, 친구들과 격리시키고, 협박해서 민원을 취소시키는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한테까지 전화해서 “아들이 퇴학당하는게 싫으면 민원 취소할 수 있게 하라”고 겁박했다. 

꿋꿋하게 버티던 내가 쓰러진 것은 목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그날도 그들의 협박을 이겨내고 오후 4시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 반(3학년 4반) 교실만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봤다. 

뭔가 꺼림칙하고 이상해 창문 너머로 교실 안을 보니 우리 반 반장과 담임이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숨어 있다가 선생이 나가고 반장이 집에 갈 때 붙잡아서 물어봤다. 

충격이었다. 3년치 학급일지를 전부 수정하고 있었단다. 내 민원 내용 중에서 ‘봉사활동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부분 때문에 학급일지를 전부 수정해 HR 시간에 봉사활동 교육을 꾸준히 한 것으로 3년치 학급일지를 전부 수정했다는 것이다. 

아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잘못한 게 있으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될 뿐이고, 봉사활동 운영에 문제가 있었다면 의논을 취합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뿐이지 않은가? 내가 학교의 비리를 폭로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잘못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었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가관이었다. 다음날, 그러니까 면담의 마지막 날이 된 금요일 아침 날 보자마자 장학사들은 학급일지를 나에게 던지며 “거 봐라, 3년동안 봉사활동 교육 착실하게 잘 했는데 왜 거짓말 하냐”며 화를 냈다. “어젯밤에 고친거 다 봤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웃음이 나오는데 나에게 내 생활기록부를 던져줬다. 

웃음이 사라지고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내 생활기록부에는 봉사활동 시간이 3년간 60시간으로 돼 있었다. 난 1학년, 2학년 때 모두 22시간 한 게 전부였다. 학교에서 내 봉사활동 시간까지 조작한 것이다. 

“너도 똑같아. 이 거짓말쟁이야. 너도 막도장 찍어서 60시간 채웠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깨가 떨리고 눈물이 마구 흘렀다. 이런 학교를, 이런 사회를 살아갈 자신이 나지 않았다. 학생 하나를 두고 모든 걸 다 조작할 줄은 몰랐다. 

이 때 담임이 나타나 나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남선아 너도 힘들겠지만 나도 힘들고, 이 일이 학교 박으로 알려지게 되면 무슨 망신이냐. 이제 그만하자” 정말 그만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난 학교의,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에 굴복한 초라한 어린이가 돼 있었다. 장학사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만 민원을 취소해달라고 하고 집으로 일찍 돌아갔다. 

일주일인가 뒤에 집으로 통지서같은게 왔다. 청와대였다. 뭘까 싶어서 열어봤다.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도남선(귀하)가 신청하신 민원이 정상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내가 제기한 민원을 해당 부서로 넘기는데 반년, 민원을 취소시키려고 협박하고 서류를 조작하는데 일주일, 그리고 취소된 민원의 통보도 딱 일주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르긴 해도, 아버지께서 민주투사라고 말씀해주셨던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통령은 민주투사였어도, 사회 전체가 다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 때 알았다. 

고민이 됐다. 이런 사회를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힘이 없는 사람은 정당한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구나라는 걸 느꼈다. 나는 분노했고 꿈을 꿨다.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 좀 더 구체화 시켰다. 법을 만드는 사람이 되거나,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되거나, 법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 

그리고 꿈을 행동에 옮겼다. 샛길로 샌 적은 있지만 결국 23살 이른 나이에 기자가 됐고 온갖 부조리와 싸웠고 싸우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옳은 소리를 했을 때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 사람이 설령 중학생이라 하더라도 무시해도 된다는 법은 없다. 

분노가 사람을 꿈꾸게 한다. 내 경험이었다. 꿈꾸는 이가 어린이, 청소년, 청년이라면 그네들이 그 꿈을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하는 이는 우리같은 어른이다. 또 부당함에, 부조리에 마음껏 분노할 수 있도록 매려 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학생들의 개학에 즈음해, 부족하지만 강단에 서야 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며 한 각오다. 

긴 이야기에 한 가지만 더 보태자면 최근의 #미투(나도 당했다)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권력관계에 의한 성폭력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했던 현상이다. 이 #미투가 언젠간 성폭력뿐만 아니라 부당한 대우와 각종 부조리를 폭로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남선 기자 aegookja@hanmail.net

<저작권자 © KNS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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