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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한민족 기원 알려면 세계사 사조 흐름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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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한민족 기원 알려면 세계사 사조 흐름 주목하라
  • 김명민
  • 승인 2018.07.1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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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민 한문화사 공동대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한민족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겠으나,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내용을 재고하여 살펴본다면 우선 재야사학의 필진들에 의해 한민족의 역사는 단웅으로부터 약 반만년(4351)의 역사이며, 거발한 환웅으로부터 약 6천년(5915)의 역사이고, 12환국연방시절의 안파견 환인으로부터는 무려 만년(9217)의 역사에 이른다는 것으로 세간의 중론이 된지 오래다. 이는 기록상으로 전해지는 지상 최초의 나라인 것으로 엿볼 수 있다.

'지상 최초의 나라' 이것을 전제로 가정하여 세계사의 시원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기에 지상 최초의 나라를 집대성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면, 세계사 족보책은 여기에 해당 할 것이다. 일찍이 계연수가 발간한 '환단고기'를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탐독한 이후 경건한 후학들의 약진으로 인해 수많은 재야사학자의 탐구서와 스스로를 졸작이라며 겸허한 태도로 출간한 연구서들이 즐비한 가운데, 그러나 오늘날 “환단고기”의 평가에서 부분적으로는 위작의 논의도 인정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현재 세계학회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수메르 언어 연구의 종주국인 구소련과 우랄 알타이 중심으로 유라시아 역사를 선도하는 러시아와 갑골문 연구의 종주국인 프랑스에서는 이미 탱그리(단군) 제사장의 존재를 빼고서는 동북아시아 일대의 역사는 논할 수 없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나아가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12환국연방시절에 있었던 우루국과 수밀국의 문화와 언어가 수메르 민족과의 유사성으로 고고학계에서는 일찍이 고대 12환국을 서양을 비롯한 세계의 고대사라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는 눈치이다.

세계사 사조의 움직임이 이러할 진데, 국내 강단 사학계의 고리타분한 의식지체는 오히려 민중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국내 사학의 한계는 그 유명한 이병도 일파가 저지런 오리진 조국의 역사말살에서 국혼 지우기에 이르기까지, 상고사보다 더 심했던 역사 왜곡과 날조의 연대시기에 있어서 조선 500년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사대부들이 즐겼던 문인화와 수많은 작품들로 말미암아 언감생심, 제 아무리 일본인들 그리고 제 아무리 서구의 막대한 지원금이었던들 그 많은 기록들을 어찌 다 조작할 수 있었으랴!

찾아보면 사초의 기록으로도 사대부의 문인화와 수필과 소설, 또는 시조 등의 작품으로도 조작되지 않은 체 온전하게 파묻혀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생생한 삶과 살아 움직였던 생 얼굴들을 마주볼 수 있을 것이다. 웅혼했던 역사는 바로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선조들의 연속적인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나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자긍심과 자부심을 북돋우는 호연지기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현장을 찾아서 떠나는 한 재야역사시민단체에는 동참을 문의하며 현재 신청이 잇따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을 찾아서 떠나는 역사탐방! 바이칼의 부리아트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한국인이라는 놀라운 연구가 발표되었는데, 부여족인 부리야트족은 지금도 부여의 시조 동명성왕을 고구려칸으로 알고 있다.

지난 2017년 6월 대조선재단역사학회. 세계천부경협회. 빛의지구 단체에서 동해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항에 입항해 아무르강을 따라 바이칼호수. 카자흐스탄. 우주베키스탄 등 대조선의 중심 아시아 유역과 유럽,아프리카 등지와 68개국의 대조선 유적지를 탐방하고 장장 1년간에 걸쳐 2018년 5월에 귀항한 대 탐방의 실질적인 성과에 영향을 받은 분위기이다.

그렇다면 강단사학계에서는 조선 500년 도읍지와 웅비했던 강역에 대해서 근거에 충실한 사료를 바탕으로 재조명해 볼려는 시도라도 있어야 한다.

1919년 3.1 운동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기에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가 창간되고 같은 해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 중 동아(東亞)의 뜻을 해설한 권덕규 선생의 컬럼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우리 땅을 조각 나누어 육대주(六大洲)라 하니 동(東)에 아시아요, 서(西)에 유로파, 아푸리카 및 남북(南北) 아메리카며 남(南)에 오시에니아니 그 명의(名義)는 ...”
"우리 조선(朝鮮)이라는 지역(地域)이 음산남북(陰山南北) 흑수이남(黑水以南) 반도(半島)까지의 동아(東亞) 및 북아(北亞)의 대륙(大陸)임은 역사(歷史)를 읽는 이의 다 인정하는 바어니와 ..."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기까지 우리 땅을 조각 나누어 육대주(六大洲)라 했고 그리고 우리 강역에 범위가 음산남북(陰山南北) 흑수이남(黑水以南) 반도(半島)까지의 동아(東亞) 및 북아(北亞)의 대륙(大陸)임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한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면 1980년대 공전의 히트를 쳤으나 진위논란에 휘말렸던 한단고기와는 달리 <규원사화>는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위에서도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가 작성된 말하자면, 그동안 강단사학계에서 신주단지처럼 모셔왔던 금지옥엽의 실증사관적 문헌을 명실공히 재야사학계에서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자타공인격 문헌이다. 그래서 <규원사화>에 표기된 대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시비 하는 것 자체로서 아마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겠다.
이미 일본의 조총련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중학교 교과 과정에 등재하여 뿌리깊은 역사의식을 어릴 때부터 고취시키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과 비교했을 때 눈 여겨 보아야 할 문제이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로서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이다. 이것을 근간으로 고조선의 강역과 조선 500년(대조선)의 강역을 재조명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원문]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猰貐,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 유(貐)자 앞부수가 犭임

[해설]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大荒)에 다다르고
서쪽은 알유(猰貐)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淮岱)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창해(蒼海)에 닿으니,
가르침이 점차 퍼져나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중략)

이와 같이 고조선에 대한 강역기록이 동서남북 사방 개념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북쪽 대황(大荒)은 고비사막 북쪽을 연하는 지역,
서쪽 알유(猰貐)는 산서성, 섬서성 지역,
남쪽 회대(淮岱)는 회수와 태산 지역,
동쪽 창해(蒼海)는 태평양

* 알유(猰貐) : 하(夏)나라 때는 훈육(獯鬻), 은(殷)나라 때는 험윤(獫狁), 진(秦)․한(漢) 때는 흉노(匈奴)라 함

이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규원사화 단군기에 나타난 고조선의 강역

▲ 규원사화에 기록된 대조선의 강역 원문

"무릇 조선의 땅은 북으로 대황(大荒)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려우며,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대황은 고비사막 북쪽을 연하는 지역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은 현재의 사하공화국일대와 북극
*현 몽고는 이동시킨 국가. 당시 몽고는 사하공화국 서쪽에 있었음.
*만리사막은 중공 황화강 서쪽부터 시작되는 사막
*한나라는 오랑캐를 뜻하는 漢으로 당시는 서구양키들을 뜻함

이를 강역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700년대 중반까지 조선 500년(대조선)은 3만리 강역으로 보이며, 대조선 연방이 해체될 때는 1만리 강역이었을 것으로 사료 된다.

▲ 규원사화 기록을 근거로 한 황제가 직접 통치한 대조선의 강역도(서와선생 강역표시 도움)

▲ 대조선연방 해체시 강역

이상으로 1675년 북애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를 살펴 보았고,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며 1921년 조선어 연구회를 설립하고 주도했던 사학자이면서 국어학자(1890~1950)였던 권덕규 선생의 “동아”의 해설에서는 동북아 대륙이 곧 조선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며, 당시 민중들에게 알렸던 사실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찬란한 유산으로 남겨진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또 어떠한가?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조선 25대 472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대서사적 기록의 보고(寶庫)다.
태조 고황제 이성계 개국때부터 매일아침 조간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태종때부터는 석간까지 발행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방대한 기록이 총1,893권 888책 속에 한문 글자 수 5,300여만 자를 담고 있다.

하여 일제가 이 방대한 기록을 전부 파헤쳐서 조작 왜곡날조하지는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승정원일기 같은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 보다도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으로 어찌 이것을 전부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옛 조선 선비들이 남긴 문인화와 글과 시조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다양하였기에 조작 왜곡의 시도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리라!

그럼에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의 국역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조선왕조실록 중에는 많이 알려진 태조실록과 선조실록, 인조실록 등에서 위변조의 색채가 심한 부분을 비판 없이 식민잔재의 강단사학편에서 충실이 따른 흔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편 그러한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직역한 한문화사(대조선역사학회)의 주장은 어떠한가! 아! 대단원의 대조선 5백년 영토 강역과 선조들의 웅비했던 기개등을 탐구해보는 시간이야 말로 좁아터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보람이라면 보람이라 할 수 있겠다.

때마침 여기 한문화사(대조선역사학회)가 내놓은 조선의 공식국호를 논한 주장의 일부를 발췌하여 담아보면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문화사간행 일부 인용> 조선(朝鮮)의 의미에 대하여는 만주발음으로 쥬신이라고 하여 주신제국이라고 주장하거나, 고대 발음으로 차오센으로 발음된다고 하여, 고삐를 먹는 순록의 나라를 뜻한다고도 하지만, 한국 역사학자들은 한자를 잘 모르니 아직 정설이 없는 상태, 아니 설조차도 없는 상태이다. 강단사학자들은 한자를 잘 모르는 것을 떠나 사서나 실록도 제대로 공부 안했다는 것으로 판단한다. 오로지 서구왜구의 일제(서구왜구를 진정한 의미에서 일제라고 해석하고 있다.)와 매혼노들이 가짜로 만든 반도식민사학만 알고 또 그런 자들이 민족혼을 갉아 먹고 있다. 그런자들이 우리 민중에게 대조선의 국혼을 부활시키거나 자부심과 웅지와 자긍심을 심어주겠는가?

“수메르어는 한국어와 유라시아어의 조상어인 르완다어와 인디언어의 조상어인 북소토어를 기본으로 하여 동방민족이 BC 3500년경 수백년에 걸친 노아의 대홍수기에 티그리스 지역으로 이주하여 현지인과 융합되었으므로 셈어의 조상어인 하우사어 등과 혼합된 언어인 것이다. (루갈 자게시도 수메르어지만 인디언 조상어인 북소토어에서 기원한 말이다) 조(朝)의 의미조선(朝鮮)의 조(朝)는 르완다어 juba로서 태양 (sun)을 뜻하는데, 이것은 르완다어가 변화한 스와힐리어 jua가 태양 (sun)인 것을 보면 확실하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조(朝)의 발음은 원래는 주였을 것이며, 중국의주(周)나라는 바로 태양(sun)즉, 천자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鮮)의 의미 선(鮮)은 로지어 shenji로서 추적자, 추종자 (tracer, follower, tracker)의 뜻이다.한자 선(鮮)은어(魚)+ 양(羊)으로서 <물고기와 짐승>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냥하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다.조선의 의미 그렇다면 조선(朝鮮)의 의미는 <르완다어 juba(sun) + 로지어 shenji (tracer, follower)>로서 태양을 추적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수메르가 동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루갈자게시의 국호인 조선(朝鮮)의 의미는 수메르의 동천인 것이다.14세단군은 수메르의 제3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루갈자게시가 동방으로 이동하여 부여조선을 개국한 것이다."

"이것은 인류 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역사의 퍼즐에 대입하면 모든 의문점이 다 풀리는 것이다. 당시 수메르 문명이 동방의 문명보다 수백년 앞선 것이므로 당연히 수메르에서 온 단군조선이 화족 등 남방족을 정복하고 대륙을 다스릴 수 밖에 없는 필연인 것이다. 대조선은 태양과 달과 지구를 취한 나라이다. 일제의 식민사학 ㆍ반도사학은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짓밟고 없애고 있으나, 대조선사가 밝혀지면 일본과 중공의 역사조작은 사라질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국사는 폐지하고 새로 쓰여질 것이며, 참회와 반성하는 교수와 교사는 진짜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하며, 반성치 않는 사학자와 선생들은 모든 직분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현 중공지도부는 이 역사적 사실기반을 둔 대조선을 두려워 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중공의 동북공정은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朝鮮)은 아침의 나라나 아침의 땅이 아니다. 근세조선, 즉 대조선은 태양과 달과 지구를 모두 취했다. 태양과 달과 지구를 뜻하는 日과 月과 곤륜산이 합쳐진 일월오봉도 ㆍ일월오악도가 바로 明이다. 명은 지혜ㆍ현명 ㆍ명철 ㆍ갸륵ㆍ현자라는 뜻이다. 大 자를 쓴 大明은 위대하고 현자의 나라다 라는 뜻이다. 역사학적으로 조선 창업자 태조 리성계만이 高皇帝를 썼다. 고황제는 역대 천자ㆍ황제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현자였다는 뜻이다. 이런 모든 게 점철되고 합쳐서 한조선 ㆍ부여조선 ㆍ배달조선을 근간으로 하여 대조선을 국호로 정한 이유다.”

다음은 태조 고황제 등극과정과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조선실록을 살펴보자

1. 황제로 등극과정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8일 정유 2번째기사(태조 리성계에게 황제로 등극을 주청한 기록)
切念軍國之務, 不可一日無統, 擇於宗親, 無有可當輿望者, 惟門下侍中李 【太祖舊諱。】 澤被生靈, 功在社稷, 中外之心, 夙皆歸附。 於是一國大小臣僚閑良耆老軍民等咸願推戴, 令知密直司事趙胖, 前赴朝廷奏達, 伏乞照驗, 煩爲聞奏。 俯從輿意, 以安一國之民。

※ 원문해석: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군정(軍政)과 국정(國政)의 사무는 하루라도 통솔(統率)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종친(宗親) 중에서 가려 뽑아 보니 세상의 인망(人望)에 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문하시중(門下侍中) 리성계(李成桂)는 살아있는 생명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며, 공로는 사직(社稷)에 있어서, 중심과 밖 즉 조정과 백성의 마음이 일찍부터 모두 진심으로 붙좇았으므로, 이제 온 나라의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군민(軍民)들이 모두 (황제의 지위를) 받들기를 원하여, 지밀직부사(知密直司事) 조반(趙胖)으로 하여금 앞서 조정(朝廷)에 가서 주달(奏達)하게 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번거롭게 아뢰옴을 밝게 살펴서 여러 사람의 뜻을 굽어 따라서, 한 나라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소서.

2.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9일 병오 첫 번째기사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기록)
丙午/遣藝文館學士韓尙質如京師, 以朝鮮、和寧, 請更國號。 奏曰: "陪臣趙琳回自京師, 欽齎到禮部咨。 欽奉聖旨節該: ‘高麗果能順天道合人心, 以(妥) 東夷之民, 不生邊釁, 則使命往來, 實彼國之福也。 文書到日, 國更何號, 星馳來報。’ 欽此切念小邦王氏之裔瑤, 昏迷不道, 自底於亡, 一國臣民, 推戴臣權監國事。 驚惶戰栗, 措躬無地間, 欽蒙聖慈許臣權知國事, 仍問國號, 臣與國人感喜尤切。 臣竊思惟, 有國立號, 誠非小臣所敢擅便。 謹將朝鮮、和寧等號, 聞達天聰, 伏望取自聖裁。"

※ 원문해석: (태조실록에 의거, 태조의 등극 후 진행과정에서의 국호관련 문무대신들은)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대표로 경(京. 여기서 경은 태조 고황제가 계시는 곳. 상제가 계시는 곳을 경이라고 했다.)에 보내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 어느 것을 국호(國號)로 쓸 것인지를 청하게 하였다.

아뢰기를: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예를 다하고) 수창궁(대명전. 태조즉위시 수창궁을 조선의 정궁으로 삼았다가 3년 후인 1395년 중공 섬서성 서안의 한나라 미앙궁터에 경복궁을 지어 이어함)로부터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받아보고 이르기를, 삼가 (황제의)성지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인 즉: ‘고려에서 과연 능히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인심에 합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사절(使節)이 왕래하게 될 것이니, 실로 나라의 복이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한상질)을 선택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국사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태조 출생지로 함경도 회령부) 등의 칭호로써 명성이 하늘의 뜻에 달하옵고(聞達天聰), 엎드려 바라오니 삼가 황제께서 선택하시어 어새(御璽)로 승인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국사편찬위(국역)의 내용은 다르다. 즉 원문을 조작하여 한국사에 실은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대소신료가 태조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명나라의 예부에 사신을 보내자고 청하다. 하고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國號)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이상 살펴 본거와 같이 원문에는 명나라 예부가 없으며, 사신을 보내자는 요청도 없고 중국 남경, 중국 서울이 없다. 이처럼 식민반도사관자들은 원문에도 없는 기록을 조작 왜곡하여 한국사에 삽입해 ‘리성계가 명나라로부터 왕의 첩지를 받고 등극했다, 국호는 명나라에서 정해 주었다’로 조작날조해 우리 학생들과 국민에게 가르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화 하고 있다. 이는 이 남북의 땅에 모든 역사를 삽입해 식민노예근성자로 만들려는 저의가 아니고서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다음은 선조임금 당시 임진왜란 중에 부산포에서 한양까지의 거리를 비정한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87권, 선조 30년 4월 13일 계유 7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에 실린 원문에 釜山海澨沿遞而來, 直循內地, 以達兩直、齊、折 、閩、粤, 形勢連絡, 如萬里長蛇,.. ./중략…. 이라고 되어있다.

선조실록에서 밑줄그은 부분은 "부산포에서 한양까지의 거리 비정" 이다.

이를 해석하면 부산의 해변은 연해를 따라오면 바로 내지(內地)를 통하여 양직(兩直)•제(齊) - •절(浙)-•민(閩)•월(粤)에까지 닿을 수 있어 형세의 이어짐이 마치 긴 뱀이 만 리에 뻗친 것과 같으니 /중략

부산 해변의 길이가 만리에 뻗쳐 있다는 것은 당시 부산포로부터 왜구가 진격 해 들어올 수 있는 한양까지의 거리를 비정하여 여만리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산 해변은 사실 기백리 이상이 되지 않는 거리이기에, 기백리 이상 되지 않는 길이를 여만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강을 표시한 지도에는 여만리의 기록답게 굽이굽이 뱀의 형상을 닮아있다.

지도에서 보는 거와 같이 장강(양자강)의 총 길이는 6,300km에 이른다.
서구와 왜구(총칭 왜노)들이 장강(양자강) 하류를 4천척의 군함으로 최초 침략을 단행했다는 것과 조선은 각 지역 해군기지에 6800척의 군함이 있었고, 임란 발발 후 제후국에서 1만척의 군함이 참전했다는 실록의 기록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배운 교과서상에서 300대 12척, 울돌목에서의 명란대전을 비교 할지라도 임진왜란의 격전 지역은 이와 같은 넓은 지역이어야만 한다.

저 앞에 보이는 다리가 남경장강대교(6772m)이다.

겨우 295미터의 폭으로 적선 300척을 어찌 유린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양쪽에 큰 암초가 있어서 실질적인 폭은 120m였다는 데 말이다.

울돌목이 있는 진도대교의 모습이다.

이와같이 선조실록의 내용으로 봐도 대조선의 강역은 앞서 권덕규 선생의 “동아”에 대한 해설과 북애자가 밝힌 규원사화에 나오는 강역의 크기와 일맥상통 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다음은 선조 27년 갑오(1594년 9월 2일 정축. 1592년 임진왜란 발발 2년 후), 접대 도감이 유 총병의 차관 나사괴 등을 만나 논의한 내용을 살펴보자.

“유 총병(劉總兵)의 차관(差官) 나사괴(羅四魁)·서의(徐義) 등에게 역관(譯官)을 시켜서 재삼 도감에 초청하였는데도 끝내 오려고 하지 않으므로 어둘 무렵에 도감 낭청 이철(李鐵)로 하여금 그들의 하처(下處)에 나아가 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말하기를 ‘우리가 며칠 전 영남(嶺南)에서 장상공(張相公) 대신(待臣)을 배종하고 통주강(通州江)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소문을 들으니 준봉(準封)·준공(準貢) 등의 일에 대해 조정의 의논이 아직 귀일되지 않았다고 한다. 과도관(科道官)은 모두 「왜구들에 봉작(封爵)을 허락하는 것은 괜찮지만 조공을 허락하는 것은 불가하다. 만약 조공을 허락한다면 영파(寧波. 중공 절강성 동북부 해안에 위치한 무역거점 항구도시)의 길을 경유해야 하는데 그간의 사정을 모두 엿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므로 흉모(兇謀. 끝없이 중상모략을 하여 착한이들과 의로운 사람들을 죽임)를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이니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예부(禮部)의 나상서(羅尙書)의 뜻도 또한 그러하였다. 여러 과(科) 중에서 남경(南京) 과도관의 논의가 가장 준열(峻烈)하였다. 당초에 송야(宋爺.송응창)·이야(李爺. 이여송)가 모두 웅천(熊川)·제포(薺浦)·가덕(加德)·가리포(加里浦)·거제(巨濟) 등지를 왜적(倭賊)의 경지(境地)라고 하고 왜적이 이미 바다를 건너서 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중략”

※ 주석: 임진년 반란인 임진왜란은 서구와 해적질하던 왜구들이 국가로 인정해 달라고 했지만 조선에선 봉작은 괜찮지만 국가로서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고, 그 연유는 서구와 왜구들이 끝없이 중상모략을 하여 착한 이들과 의로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경계하는 주장이다. 덧붙이자면 “임진왜란”이라는 말에서 그 연휴는 이미 밝혀져 있다. 그것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한 국가안에서 어떤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기에 임진년에 있었던 왜란이라 이름 붙였던 것으로 해석함이 옳다. 이것은 병자년에 있었던 여진족의 반란, 즉 병자호란도 여기에 해당 되는 것으로 사료된다.

다음은 인조임금 당시 실록의 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登壇端坐~ ~上離座。率李倧及其諸子文武群臣。拜天。行三跪九叩頭禮畢。上還座~]

[(청태종이) 단에 올라 바르게 앉아~ ~(인조와 일행이 도착하고 나서) 청태종이 (단 위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인조(이종)가 그 아들들과 문무군신을 이끌어, 하늘에 절하는 삼궤구고두례를 행하고 마치자, 청태종이 (단 위의)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서 보는거와 같이 첫째 인조는 그 일행과 배천(拜天)하는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조가 배천하는 동안 청태종은 단 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추할수 있는 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를 위해서 천자만의 고유 권한 앞에 청태종은 제단과 제를 준비하고 인조가 제단에 들어서자, 청태종 일행은 제단 밑으로 물려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운 현재 해발 400m 높이의 남한산성에서 인조임금과 일행이 고전한 40일간의 기록과 잠실에 있는 삼전도비의 진실은 어떠한가!
남한산성은 하멜표류기에 의하면 한양의 남쪽에 위치한 진령산맥이 있는 시안의 정남쪽 남산(목멱산,종남산, 해발 2메일 높이)이 있다고 표현 되었는데, 실록과 사서에도 종남산ᆞ목멱산이 해발 2메일(3218m)높이로서 남한산성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삼전도는 조선 임금이 사냥하는 터로서 예로부터 신선이 산다는 '봉래 ᆞ방장 ᆞ영주지역' 등 3지역이 어우러진 곳을 삼전도라고 일컫는다. 사실이 이러할진데, 사서와 실록에 의한 지역을 현재 잠실에 있는 삼전도비와 서울외곽 하남시에 있는 남한산성에다가 비정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음을 알수있다.

조선왕조실록 1672년 인조실록 정묘호란때에 인조임금이 호사(호의사신)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에 "천자의 존귀한 몸으로 호사를 접견할 것이니 호사를 데리고 샛길로 오도록 하라" 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부분을 유추하자면 인조임금이 즉 천자였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후금은 없고 그냥 "호"라고 명칭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국사에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청나라 군사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기어다녀야 했고, 청황제 앞에 다다라선 이마빡에서 피가 나오도록 3번 돌에 찢고 9번 절하였다고 나오는데, 조선실록과 사서에는 조선군이 오히려 여진족을 토벌하는 기록은 태조 홍무제 리성계 고황제(고려 장군으로서)때부터 여진족을 감시하고 통치하며, 반란의 조짐이 있을시 토벌했다는 기록이 1860년대까지 실록에 나와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에도 선조의 명으로 여진족을 토벌했다는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1400년부터 1600년도까지의 여진족 통치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주요기록은 제다 무시하고 인조반정이 있었던 인조실록을 가필 조작하여 이마빡에서 피가 나오도록 3번 돌에 찢고 9번 절했다는 충격적인 오욕과 관념적인 상징으로 민중의 뇌리에 못 박히도록 국사학 주요 지면을 차지 한 것은 아닐까! 솟구치는 피가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서 심장으로 느껴진다면 잃어버린 우리 역사에 대해서 누구인들 애써 살펴 볼 일이다.

[외부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명민 wooin7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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